언젠가 스누라이프에는 미국 한 고등학교에서 수석졸업한 학생의 고별연설이 올라와 많은 추천을 받았다. 그 학생은 자신이 학교에서 누구보다도 시험을 잘 치는 사람이었다며, 학교에서 제공한 주입 과정을 가장 충실하게 이행한 공로로 그 자리에 서게 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그의 연설문에서 다음의 이야기를 인상깊게 보았다.
이제 곧 학교를 떠나는 동기생들에게는, 지난 몇 년 간 교실 내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잊지 않기를 당부합니다. 여러분의 후배들을 외면하지 마세요. 우리는 세상의 미래이며, 잘못된 전통을 고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
이제 이 학교, 학교를 운영하는 모든 분들, 그리고 후배들에게 작별을 고해야 합니다. 하지만 영원한 작별이 아니고 ‘다음에 또 보자’는 인사입니다. 우리가 함께, 진정한 교육 시스템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 다시 만나야 하니까요. 하지만 일단은, 우리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고 인증하는 종이 쪼가리부터 받도록 하겠습니다!
나 또한 어릴 때부터 우리나라의 교육 시스템에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자랐다. 당시에 내가 학생으로서 경험할 수 있었던 사회라고는 학교와 학원이 전부였기에 나의 불만들은 주로 교육의 영역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내가 경험한 학교에서는, 학생 개개인의 호기심과 창의성은 무시되었고 모든 학교급의 교육과정은 대학 입학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관문으로 수렴하였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이유조차 고민해 보지 못한 채 똑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만 했다. 그런 우리에게 대학이라는 존재는 너무나도 크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 또한 사회에서 최소한 인정해 준다는 ‘대학교 합격증’이라는 것을 받아 놓아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단 그 과정을 견뎌 내기로 했다. 하지만 이런 불합리한 교육 제도를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까지는 물려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졸업을 하고 어른이 되더라도 지금 느끼고 있는 문제의식을 잃어 버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대학에 입학할 당시까지도 나의 마음 한 켠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그 다짐이 지금 와서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학에 와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문제들이 존재함을 깨달았다. 초중등교육 문제의 해결은 대학의 문제들과 관련이 있었고, 또 대학의 문제들은 취업의 문제와 노동의 문제와 정치의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또 이들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하다 보면 근본적인 해결 방안은 다시 교육에 있는 것 같았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처럼 사회의 문제들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친구들과 혹은 선생님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그래서 해결이 안 되고 있는 거다!’라는 그런 무기력한 결론에 도달할 뿐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해 볼 때, 닭에도 문제가 있고 달걀에도 문제가 있다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두 개를 동시에 바꿔 버리거나, 둘 중 어느 하나에서 시작점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두 가지를 동시에 바꿀 수 있는 것은 혁명 또는 대대적인 개혁에서나 가능할 법하다. 그게 아니라면 어떤 변화라도 시작점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인생에서도 그것을 시작해 나갈 결단의 지점이 필요하다. 사람들 중에는 고등학생 때 자퇴를 하고 1인 시위를 하는 사람도 있고, 미래에 사회에 나가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 실력을 쌓고 있는 사람도 있다. 나는 이들 중 특별히 어떤 선택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고등학생 때 자퇴를 하는 사람도 존재하고 미래를 위해 준비를 하는 사람도 존재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희망적으로 바뀌는 것 같지가 않다. 추측해 보건대 많은 사람들이 결국에는 포기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들이 포기하게 되는 이유는 아마 세상을 바꾸는 것이 생각보다 힘든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생 때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에게서도 자신이 이 사회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고 회고하는 한숨섞인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 오천만이 살아가는 이 거대한 사회에서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나는 내 시선을 학교 안으로 돌려 보았다. 우리 학교의 사람들은 모두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 온 사람들이다. 그중 많은 사람들은 사회의 부조리에 분노하고 우리 주변의 크고 작은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며 산다. 또 많은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대화하기를 원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각 분야에 대해 탁월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 학교는 사회 전체에 비하면 규모가 작은 반면에, 한국사회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우리의 입시요강은 전국의 고등학교에 영향을 주며 우리 학부교육의 문제점은 전 국민의 걱정을 사기도 한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변화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우리의 학교에서조차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한국에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우리 학교에서 무언가를 시작해 보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조차도 어려운 일임을 알기에, 지금까지도 준비만 하는 과정이었지만 쉽지는 않았다. 대학에 들어와서 주어진 일들을 정신없이 해 내다 보면 어느새 그 다짐을 잊어 버리기도 쉬웠다. 너무 바쁠 때도 있어서 준비를 하다가 말다가를 반복해 왔다. 그렇게 이제는 대학에 들어온 지 두 번째 겨울을 맞았다. 이 글을 쓰는 것은 그 다짐을 더 이상 잊지 않기 위함이다. 그래서 내 머릿속으로만 가져 왔던 생각들을, 몇 명의 친구들과 교수님과 나눴던 이야기를 여러분과 공유해 보려고 한다. 이 글은 대학과 공동체와 공론장에 관한 글이다.
학생사회에 대한 생각
맨 먼저 내가 속한 학생사회에 대한 생각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런데 나는 이 절을 작성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나와 삶의 공간을 공유하는 학우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학우들 중에는 어려운 형편 속에서 학업을 유지하는 사람도 있으며,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사회 변혁을 위한 뜨거운 열정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내가 조심스러운 것은, 그들 각자의 열정을 진심으로 존경하기 때문이다.
내가 서울대에 온 보람을 가장 크게 느낄 수 있었던 부분은 바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조금은 웃기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스누라이프의 글들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을 큰 행운으로 여긴다. 스누라이프에는 이상한 글들이 많이 올라오기도 하고 이에 대한 학우들의 인식도 좋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그런 다수의 글들 사이에서 다른 곳에서는 접하기 힘든 소중한 글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에는 서울대생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그렇지만 수없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고민이 담긴 글들이 올라온다. 본인의 학업에 회의감을 느끼는 학우의 고민, 사람들과의 관계로 괴로워하는 대학원생의 고민, 회사원의 고민, ‘흙수저’의 고민, 장애인의 고민, 성소수자의 고민, 외국인 학생의 고민, 불의에 분노하는 사람들의 고민, 한국을 떠난 사람들의 고민, 각자의 환경은 달라도 그들의 진지한 생각이 담긴 글들을 통해 내가 경험할 수 없는 삶의 지평들을 접해 볼 수 있었다.
나는 서울대인의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치열함이라고 생각한다. 일반화하기는 어렵겠지만, 다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들어온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대화를 할 때나 그들이 쓴 글에서 그것을 느낄 때가 많다. 공부를 할 때는 물론이고, 본인의 진로에 대해 고민할 때의 치열함, 본인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문화에 순응하지 않으려는 치열함, ‘평범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는 치열함, 사회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치열함 등. 사회 전반적으로도 냉소주의가 우세해지고 있지만 그래도 많은 서울대의 사람들은 그 치열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우리 학교 사람들의 그런 점이 좋았다.
반면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인식에는 의사와 법조인과 공무원이 ‘옳은’ 직업이었고, 자신만의 길이나 소신을 좇는 것에 대해서는 일종의 허무주의가 존재하는 듯했다. 물론 현실이 녹록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의 캠퍼스에서 더 광범위하게 관측되는 현실들과 연관되는 것 같았다. 학점 경쟁과 스펙과 각종 자격시험들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큰 존재가 되어 버렸다. 아직도 대학의 많은 수업들은 우리의 생각과 아이디어와 비전을 물어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대학에서 배운 것은 서로를 닮아 가는 방법이었다. 그 속에서 어느새 우리는 각자가 마음 속에 가지고 입학했던 꿈들을 잃어 버리기가 너무 쉬웠다.
우리의 대학교는 우리에게 평범해지라고 하고 있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고 다닌 것이 아니라, 우리의 환경이 그러하다. 그 환경에는 외적인 측면도 있고 우리가 스스로에게 부과한다고 생각되는 측면도 있다.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에는 선배들의 조언을 들으며 노는 것이 미덕인 줄 알았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시 우리의 후배들에게 마음껏 놀아 두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쯤 우리는 다시 취업을 위한 수험생이 되었다. 드랍은 서로에게 장려하는 것이었고, 술을 마시는 것은 권장되는 일이었다. 장터와 도서관에는 사람들이 넘쳐났지만 강연과 토론회에는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대학생으로서 요즘의 젊은이들은 도전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생이 이에 대해 다시 반박하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는 레퍼토리였다. 정치외교학부 모 교수님도 한 강연에서, 우리 학교 학생들이 개인주의적이고 기능적으로 변해 가고 있다는 말을 하셨다가 한 학생의 비판을 받았다. 나도 우리들에게 무언가 잘못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저 이 사회에서 자라났을 뿐이다. 그렇지만 왜인지 한편으로 씁쓸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나는 스누라이프에서 보았던 한 댓글을 인용하고 싶다.
돈벌이가 어려워져서 그냥 다 각박해져서 그렇겠지만 <관심>이라는 것만은 아무리 몸이 바빠도 물질적 투자 없이 이행해 나갈 수 있는 것 같은데. 물론 사회에 관심가질 시간조차 없이 빡세게 살아야 하는 게 현실이다 하면 할 말이 없지만, […]
서울대생, 상위 1%의 대학생에겐 시간이 좀 더 있다고, 적어도 하루 10분 내어 사회에 관심가질 여유는 다른 대학생들보다 지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있다고 생각해요. <관심>을 기를 수 있는 학풍이나 학교의 역사 또한 자산이죠.
그런데 점점 이마저도 안 하는 걸 넘어서 “정말 그럴 시간조차 없어서 아쉽다,”도 아니고
“내가 왜?”
“내가 뭣때문에 그런 데 관심을 가져?”
“그런 거 귀찮게 뭐하러”
이런 반응들이 정말 많아요.
우리는 중고등학생 때부터 끝없는 경쟁에 내몰렸고 각고의 노력 끝에 여기까지 왔다. 우리가 힘들 때마다 들은 이야기는 ‘대학에 오면 놀 수 있다’는 어른들의 말이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이미 많은 것을 소진해 버린 우리들에게 또 다시 사회의 희망이 되어 달라고 하는 것은 너무하게 느껴진다. 개인의 이익 관점에서 보면 특정 연령대에게 손해를 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내 안의 무언가가 계속 다르게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손해를 보는 것은 맞다. 정치인들이 스스로 나라를 잘 운영하여 사회의 발전이 아무도 손해를 보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지금의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 사회의 발전이 특정 집단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 이루어질 수 있는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앞으로도 변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런 변화가 40대, 50대에서 시작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한 사회에서 가장 역동적일 수 있는 연령층은 20대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힘겨운 민주화도 과거 수많은 20대의 용기와 희생 속에서 달성할 수 있었다. 한때 그런 자랑스러운 과거를 가졌던 우리가, 이제는 ‘관심’조차 상실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이에 맞물려 근 몇 년 간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학생사회의 파편화였다. 이는 학생회에 대한 학생들의 무관심에서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났다. 이런 추세에서인지 올해 학생들 사이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재당선된 디테일 총학생회도 철저히 학생들의 권익을 증진하는 사업들에서 시작점을 찾았다. 학생들이 자신의 일상이 개선되는 것을 체감할 수 있게 되고 학생회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어 가고 있다는 점에서 이 변화는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에서 희망을 본다.
그러나 나는 총학생회를 비롯한 학생사회가 학생들의 권익을 주장하는 모습에서 몇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방향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지만, 그중 하나로 학교의 미래와 비전에 대해서도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다. 그 동안 학생들의 목소리는 항상 반작용으로서 존재했다. 우리는 본부에서 학생들과의 대화 없이 시흥캠퍼스를 추진했을 때 천막을 쳤고, 우리는 본부에게 학생들의 참여권을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이런 긍정적인 활동들에 더해서 학교에 무언가를 제공하는 것이다. 학생들을 포함하여 다른 구성원들의 권리를 뒤돌아보고, 학교의 미래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비전을 제시하고, 다양성의 가치를 확인하고, 학생으로서 경험하는 학교의 미진한 부분들을 앞장서 지적하는 일이다.